[이뉴스투데이 엄정권 기자] 모델 배우 메이크업 아티스트. 공통점이 있을 듯 없을 듯. 끼가 있어야 하는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훤칠한 키에 잘 생겼다. 강렬한 눈빛을 부드러운 턱 선이 커버해주고 있다. 46세.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조라고 하기엔 다소 젊다. 이는 우리네 아티스트 역사가 일천함을 보여 주는 것일 뿐, 뿌린 씨앗은 만만찮다.

▲ 메이크업 숍 '뷰티 하우스' 채성은 원장. 국내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조다. <사진제공= 채성은>
고교 졸업 뒤 한때 모델 영화배우도
 
서울 강남에서 메이크업 숍 ‘뷰티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채성은 원장을 만났다. 메이크업 숍은 평일 낮이라 다소 한산했지만 여인의 향기처럼 화장품 향은 가득했다.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어요” 채 원장의 이력서를 볼 참이었다. 그는 먼저 모델이라는 직업에 발을 디뎠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가 권했다. 모델라인 18기로 선발되고 논노 등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걸었다. TV CF도 찍었다.
1년여 모델 일을 하면서 제법 재미가 쏠쏠할 무렵 군에 들어간다. 제대 후 이번엔 영화판이 그를 불렀다. “아니 왜 갑자기 모델을 그만두고...” 묻기도 전에 설명이 이어진다. 제대 후 다시 모델 일을 하려고 했지만 강적을 만났다. 새로운 오디션 현장에서 만난 이가 바로 차승원 등 히피분위기의 개성파 신인 모델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이 길이 아니구나’ 싶어 모델을 그만두고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서울 무지개’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나섰다. 그 때 또 다른 강적을 만난다. 이번엔 이병헌이다. 모 화장품 모델로 거의 굳어질 무렵 이병헌이 나타나 그 자리를 꿰찼다. 다시 영화배우로도 고배.

채 원장의 이력이 여기까지 오는 데 인터뷰가 무려 30분이 걸렸다.

유명회사 잇달아 스카우트 되며 남자 아티스트 영역 개척

한국화장품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들어간 때가 1993년. 전국을 돌며 메이크업 쇼를 하고 강의도 했다. 많은 여성들 앞에서의 메이크업 프로모션이라 막 가슴이 뛰었다고 채 원장은 기억한다. 아티스트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무대도 직접 설치하는 등 잡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그러면서 업계에 채성은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알렸다. 정확하게는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있더라, 하는 정도였다.

이후 에스티로더로 스카우트 된다. 남자로만 팀을 만들고 프로모션에 뛰어든다. 다른 회사들이 흉내 내면서 채 원장 팀은 남자 프로모션 팀 1호를 기록하게 된다. 3년 뒤 샤넬로 자리를 옮긴다. 남자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대리 직급을 받는다. 

▲ 채성은 아티스트의 메이크업 쇼 모습. <사진제공= 채성은>
“왜 이렇게 자주 옮겼나요.” 물음에 채 원장은 ‘스카우트 됐다’고 힘 줘 답한다. 한 직장에 3년 정도 있으면 다소 정체되고 식상하게 된다고.
맥으로 옮긴 채 원장은 메이크업에 새로운 재미를 느낀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메이크업이 신비롭다는 느낌마저 가졌다”고 채 원장은 돌이켜 본다.
남아공 호주 등으로 메이크업 쇼를 위해 단신 날아갔다. 보름동안 열리는 패션 행사에 하루 종일 30명 넘는 모델을 상대로 백 스테이지 메이크업을 했다. 여기서 패션 메이크업에 눈을 떴다고 채 원장은 고백한다.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제품 믹스 기술을 배운 것. 메이크업에만 있는 신비함과 자신의 이론을 비로소 접목할 수 있었고 이는 ‘채성은 표(標) 메이크업‘의 시발이 됐다. 채 원장은 이후에도 베네피트, 비디비치, 바닐라코 등에서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활약하며 메이크업 쇼 뿐 아니라 제품 콘셉트 결정에도 참가하게 된다.

메이크업 비용 저렴하게 직접 메이크업 숍 차려

그가 직장을 많이 옮긴 것은 우리 메이크업계를 위해선 다행이다. 다니는 곳마다 새로운 메이크업 콘셉트를 만들고 새로운 룩을 개발하는 게 모두 업계엔 씨앗이 된 것. 기자의 후한 평이 아니더라도 채 원장이 남자 아티스트라는 직업의 정체성 확립에 큰 기여를 했다는 데 대해 업계에서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잘 나가던 채 원장은 그러나 곰곰 생각했다. 회사원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질 즈음, 메이크업 비용이 왜 이렇게 비싸야 하는가.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할 방법은 없을까. 직접 나서기로 했다. 소비자를 찾아 거리로 나왔다. 그래서 차린 게 강남의 ‘뷰티하우스’다.

“할 만 합니까” 질문에 채 원장은 “경영이라는 게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직원과 오너의 차이를 새삼 느낍니다”. 새해 첫날, 설, 추석 하루 빼곤 연중무휴다. 그래도 선택은 잘했다. 최근에는 메이크업에 대한 개념이 ‘집에서 적당히 하는 것’에서 ‘전문가의 손을 빌려야 제대로 된다’라고 바뀌면서 찾는 손님이 꾸준히 늘고 있다. 소개팅에 나가려는 여대생, 입사 면접에 가는 졸업 예정자들, 남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고 한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나 혼주 메이크업은 특히 신경 쓰인다. 대부분 주말에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메이크업은 여자 본능적인 덕목”…‘비즈니스 아티스트’로

채 원장은 올챙이 아티스트 시절을 잊을 수 없다. 300여명 모인 백화점 매장 무대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횡설수설했던 기억도 아찔하고, 모델의 눈썹을 수정한다면서 수정 칼로 그어 피를 흘리게 했던 일도 이젠 아득하고, 백화점 매장서 ‘무슨 남자가 화장이냐’며 건달들에게 시달리던 일도 까마득한 옛 일. 무엇보다 무대에서의 긴장감이 어느 덧 담대함으로 바뀌고 프레젠테이션도 유머를 섞어 하는 여유까지 생겼을 무렵이 그는 ‘무대 위 절정의 채성은’이었다. 

20여년 경력을 뒤로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바람 부는 강남 거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혼자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아티스트’ 채성은이 이젠 손님과 세상 얘기 나누며 말동무하는 ‘비즈니스 아티스트’로 바뀌고 있다.

“메이크업은 여자의 본능적인 덕목입니다. 저는 여성의 본능에 립스틱 한 점 찍을 뿐입니다.”

 

※ 여러분의 제보가 뉴스가 됩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소비자 고발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이메일 : webmaster@enewstoday.co.kr

카카오톡 : @이뉴스투데이

저작권자 © 이뉴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